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수축한 후 세가지를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합니다.
첫째로 우상숭배자들과 통혼하지 않겠고,
둘째로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겠으며,
셋째로 성전을 돌보고 십일조와 헌물로 그 일꾼들을 부양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세 가지 모두를 어기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 드리기를 중단했고, 성전 낭실들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심지어 주변 민족과 통혼하는 풍습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특별히 느헤미야는 ‘통혼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행한 일을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 있는 기간동안 이방인 아내들이 유대인 가문으로 유입 되었습니다. 이방 여인들 중에는 모진 원수들과 동맹했던 성읍의 원주민인 블레셋 여인들이 다수 포함 되어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떠난 후에 혼인이 이루어졌고, 그 결합을 통해 낳은 자녀들이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많았습니다. 그렇게 출생한 자녀들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 했는데, 이 말은 아버지의 나라 즉, 히브리어를 잘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두 번째 아내였을 그 이방여인의 모국어를 그들의 자녀들이 배웠을 것입니다.
바사의 관리였던 느헤미야는 아람어를 분명히 알았을 것이고, 아람어를 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어떤 아이들이 히브리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모압과 암몬 사람들의 말은 히브리어와 밀접하게 관련된 방언이었으나 그 차이는 현저했으며, 느헤미야는 그 이방 방언이 유대에서 발판을 얻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에스라도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의 표시로서 자기 머리털과 수염을 뽑았다(스 9:3)고 기록 했는데, 성경에는 공인된 형벌의 형태의 하나로, 다른 사람의 머리털을 뽑는 일(사 50:6)도 있었으며, 수염을 깎이는 일은 그 자체가 큰 치욕이라고 간주되었다(삼하 10:4)는 것을 생각해 보면…,
느헤미야의 고통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