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이 없는 현실은 없다. 만일 당신이 씨름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당신을 위해 대신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다.” – 포시스
우리가 ‘구속’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누가 보아도 ‘너무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큰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식이 많다고 해서 인간의 구원의 바탕이 왜 십자가의 구속이어야 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대가를 치르신 분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 비로서 왜 우리가 쉽게 구속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욥과 사도 바울 같은 이들은 모두 큰 사건을 당한 이후로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메시지는 우리의 삶이 흔들릴 때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잘 알려 줍니다.
“오, 그분을 찾을 수 있는 곳을 알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찾는 길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도는 논리적인 원칙들을 기초로 한 훈련과 의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온몸과 전심을 다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의식에 맞춰진 기도는 아주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되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읊어질 뿐입니다. 또한 그 안에는 아픔도 경이로움도 없습니다. 이러한 기도로는 삶의 비극에서 우리를 빠져나오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구속에 바탕을 둔 기도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벼랑 끝에 설 때까지 이런 기도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비극 앞에서 비로서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벼랑 끝에 몰려서야 기도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겁쟁이 같은 태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날 수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구속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불하셨기에 우리가 쉽게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도 지불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육체의 정욕과 대항하여 싸워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것은 언제나 그만한 대가가 치러진다고합니다
시카고교회를 위해 내가 치르고 있는 대가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대가의 크기는 어떠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