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는 말은 우리가 그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뜻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5절 말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당연히 원줄기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가지치기를 당한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 전체의 핵심 주제입니다. 7절에서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반복해서 강조되었습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가지치기를 당한다고,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고,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무엇일까요? 가장 간단한 대답은 기독교인다운 삶의 태도입니다. 갈 5:22-23절에는 소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면 세상이 기독교를 다시 볼 겁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크게 구제와 봉사 활동을 했는지, 우리가 이웃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말을 했는지, 사회정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투쟁했는지가 핵심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세상을 책임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것들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그런 윤리 도덕인 삶이 무의미하다는 게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만약 본문이 말하는 열매가 윤리 도덕의 문제라고 한다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말씀은 공허한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세상에서 이런 열매는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열매를 강조하는 이유는 예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윤리 도덕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열매는 예수님에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날 수 있는 삶의 근원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핵심적으로 말하면,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게 복음의 핵심입니다